WCS Global Finals 2013 시청 후기 (스포일러 포함)

(경기 결과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지난 학기부터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해 온 연구 주제가 있는데, 최근 실험에서 좀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들을 얻어서 적잖이 낙심한 상태이다. 바로 논문을 마무리해서 발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최근 몇달을 밤낮 없이 달려왔던지라 안 그래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좀 지쳐 있었는데 그야말로 턱에 깊숙히 어퍼컷이 꽂혔다고나 할까. 이런 와중에 마침 2013년의 스타크래프트 2 프로게이밍을 결산하는 WCS Global Finals 2013이 11월 8일과 9일 양일간 펼쳐졌기에, 지도교수와의 연락 창구인 스카이프는 살포시 로그아웃 하고 집에서 여유롭게 시청하면서 잠시 기분을 전환해 보았다.

내가 응원한 선수는 SoulKey 김민철 선수와 Jaedong 이제동 선수로, 두 선수 모두 스타크래프트 1부터 오랜 시간 동안 프로게이머 생활을 한 저그 플레이어들이다. 토너먼트에 진출한 16명의 선수들 중 스타크래프트 1 게이머 출신은 이 둘 외에도 여럿 있었지만, 스타크래프트 1에서 이 두 선수들만큼 나에게 강력한 인상을 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왠지 이런 올드 게이머들이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에 가슴을 졸이며 응원했는데, 화면에 잡히는 현장 관객들이 이제동을 연호하는 모습을 보니 나만 그런 생각인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쉽게도 김민철 선수는 8강에서 테란인 Bomber 최지성 선수에게 3:1로 조기 탈락하고 말았다. 최지성 선수가 매 경기 허점을 잘 파고든 것도 있었지만, 김민철 선수가 좀 긴장했는지 맹독충과 같이 중요한 가스 유닛을 많이 흘리고, 양방향에서 테란 병력을 덮치는 타이밍이 잘 맞지 않아 병력이 각개격파되는 등 경기력이 썩 만족스럽지 못했기에 ‘최지성 선수가 더 잘했다’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패배였다.

다행히 나의 남은 희망인 이제동 선수는 16강에서 MVP 정종현을 잡아낸 것에 이어 최근 물오른 기량을 자랑하는 Dear 백동준 선수까지 3:2 역전승으로잡아내 나를 흥분시켰다. 특히 마지막 경기에서는 정찰 정보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의도를 완벽히 파악하고, 로보틱스가 없다는 점을 이용 잠복을 개발해 병력을 숨겨 놓았다가 상대의 발 밑에서 등장시키는 드라마틱한 맞춤 플레이를 해 여전히 승부사로서의 촉이 날카롭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튿날로 이어진 4강 경기에서도 Maru 조성주 선수를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잡아내고 마침내 결승이 진출, 나의 마음은 한없이 부풀어올랐다…

그러나 내가 응원하는 선수가 결승전에서 패배하는 것이 도대체 몇 시즌 째인지, 프로토스를 플레이하는 sOs 김유진 선수 앞에서 이제동 선수는 4:1로 무력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1경기는 캐논 러시로 불리하게 시작한 것을 운영으로 뒤집어 거의 다 제압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전에 돌입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판단을 하지 못해 아쉽게 경기를 헌납하고 말았는데, 어제 백동준 선수와의 경기에서도 이런 상황이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제동 선수가 엘리전에서의 상황 판단이 조금 미숙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외의 경기에서는 김유진 선수가 매 경기마다 전략을 정교하게 준비해 온 것을 이제동 선수가 잘 맞춰가지 못해 비교적 싱겁게 패배하게 된 것 같다. 아무래도 저그는 상대가 하는 것을 보며 맞춰가야 하는 입장인데, 그러기엔 프로토스의 준비가 너무 좋았다고나 할까. 이제동 선수의 피지컬적인 컨디션은 아쉬울 것 없이 좋았는데 메타-게임에서는 완패하고 말았다. 사실 이틀동안 김유진 선수도 많은 경기를 소화했는데 7전 4선승제의 긴 승부를 이렇게 잘 준비한 것이 정말 대단하고 우승할 만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열심히 응원하던 선수가 패배하게 되면 좀 맥이 빠지고 억울한 기분이 든다. 어떻게 생각하면 질 때 이만큼 속이 쓰리니까 이길 때 또 그만큼 흥분해서 좋아할 수 있는 것이긴 하다. 다만 한창 eSports가 인기를 구가할 때에는 다음에 좀 더 잘 하기를 기약할 수 있었으나, 요즘과 같이 관중의 수도 시장의 규모도 줄어들고만 있는 상황에서는 그럴 수 없어서 마음이 이전보다 좀 더 쓰리다. 이제동 선수의 나이도 이제 적지 않은 편이고, 과연 이 선수가 다시 우승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인지? 여러 모로 마음이 착잡하지만, 그래도 정리해 보면 멋진 승부였고 그래서 많이 즐거웠다. 이렇게 재미있는 컨텐츠이니까 명맥을 잃지 않고 이어져나가고 또 성장해갔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