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공대의 필연

by d_ijk_stra

언젠가 술김에 쓴 꽁트. 당연하지만 노파심에, 저를 비롯한 실존 인물들과는 완전히 무관한 픽션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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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뭐 썩 나쁘지 않다는 평을 듣는, P공대는, 대한민국의 그런 대학들 중에서는 흔치 않게도, 서울을 떠나 남부의 작은 중공업 도시에 위치해 있다. 그러다 보니 이 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주위에 달리 갈 곳도 없고 해서,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다. 한 학년이 고작 삼백명인 미니-대학이니까, 뭐 어차피 연구실 구석에 박혀 나오지 않는 대학원생들을 헤드-카운트에서 제외하면, 헤드-카운트 라는 것은 일단 대가리가 보여야 셀 수 있는 거니까, 그리고 사년제 대학이니까, 삼백 곱하기 사 하면 천이백, 고작 천이백명 정도가 그 사년동안 같은 장소에서 밥을 먹고 같은 장소에서 잠을 자고 그리고 같은 장소에서 수업을 들으며 대학 시절을 보내는 것이다. 천천히 걸어도 한 삼십분이면 끝에서 끝을 오갈 수 있는 작은 캠퍼스에서 말이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이 필연이다. 내가 어려서 읽은 판타지 소설에선 하루에 약속 없이 세번을 만났다면 목숨을 걸어도 좋을 인연이다, 뭐 이런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곳에서는 하루에 세번을 만나는 것은 썩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침 먹을 때 만나고 강의실 올라갈 때 만나고 점심 먹으러 갈 때 만나고, 아직 열두시도 안됐는데 벌써 세번을 만나니까, 그러니까 모든 것이 필연이다. 내 마음을 찢어놓은 그녀를 다시 만나는 것 조차도. 비오는 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어 혹시 저 우산을 들고 있는 건… 영희 아니니? 철수구나. 잘 지냈어? 응. 넌? 난 잘 지내지 못했어, 너를 잊지 못해서. 그런, 그리워하면 언젠가 기적처럼 만나게 되는 영화와 같은 닭살스러운 일은, 이곳 P공대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일상 속에서 만난다. 밥 먹고 후식으로 요구르트를 마시며 입가심을 하다가, 네 옆의 어떤 남자를 보았다. 그가 네 새로운 남자친구일까? 라는 그 불확실성은 오래 가지 않는다. 나는 곧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다가, 도서관 옥상에 가서 머리를 식히려다가, 그와 격정적인 키스를 나누고 있는 너를 보게 되니까. 그쯤은 필연이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고약하게 그 또한 필연이다, 우리는 틀림없이 마주친다, 하루에 세번씩.

나는 그것이 참 P공대 답다고 생각했다, P공대에는 과학대와 공학대밖에 없다, 그러니까 교수님들이 P공과대라고 할 때에는 P 공학 과학 대학을 줄여서 부르는 말인데, 사람들은 뭐 어차피 과학이 공학이고 공학이 과학이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니까, 뭐 그게 맞는 말인지도 모르고, 대체로 더 줄여서 P공대라고들 부른다. 그러니까 뉴튼이 가라사대 에프는 엠 에이라, 이게 공학인지 과학인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만, 여하간 이것은 한국말로 하면 힘은 질량 곱하기 가속도라는 말이고, 또 이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진공 상태에 있는 피사의 사탑은, 음 대기권 안에 있긴 하지만, 여튼 공기가 없다고 가정하면, 그럼 지구가 아니잖어? 아이 그럼 뭐 진공 청소기로 지구의 공기를 쏴악 빨아들여서, 공기가 없는 이탈리아의, 공기가 없는 피사의 사탑 꼭대기에서, 무거운 공과 가벼운 공을 같이 떨어뜨리면 동시에 꽝! 하고 바닥에 떨어진다는, 공기가 없어도 꽝 소리가 나나? 여튼 그런 사실을 어렵지 않게 유도할 수 있는데, 이 실험은 갈릴레이가 했다고들 알려져 있어서 다들 한번쯤 들어봤을 것인데, 당연히 지구의 공기를 모두 빨아들일 수 있는 그렇게 큰 진공 청소기는, 내가 생각하기로는, 없으니까, 갈릴레이의 시대에는 물론 없었고, 그러니까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갈릴레이의 제자인 비비아니가 지어낸 것이고, 실제로 갈릴레이가 두 공을 떨어뜨렸다면, 공기저항이 있으니까, 무거운 공이 먼저 떨어진다. 무거운 공이 중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기저항을 덜 받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진공이 아니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공기가 있고 그래서 공기저항이 있는데다가 그 외에도 온갖 부수적인 요인들이 있는데, 당연히, 음, 우리 P공대생들에게는 당연하게도, 이런 수많은 요인들을 빠짐없이 정확하게 측정하고 계산하는 것은 힘들고,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떨어뜨린 공이 정확히 언제 바닥에 꽝 하고 떨어지겠느냐, 하는 것은, 비록 꽝 소리가 나는지는 친구에게 물어봐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진공 상태가 아니면 정확하게 예측하기가 어렵다. 그러니까 우리 삶에서는 진공의 실험실을 벗어나면 오차가 있고, 그래서 우연이 있고, 그러니까 버스 정류장에서 철수를 만난 영희는, 아,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는 기막힌 인연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데, P공대에서는, 모든 것이 필연이고, 나는, 꼭 오늘, 반드시 오늘, 기필코, 에프는 엠 에이를 따라서, 하필이면 오늘 수학 문제가 잘 풀리지 않아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래서 내가 도서관 옥상에 올라갔기 때문이 아니라, 틀림없이, 어쨌던간에, 너의 그 모습을 봤어야만 했던 것이다. 만약 오늘 수학 문제가 잘 풀렸더라면, 나는 신났다고 동아리방에 기타를 치러 갔을 것이고, 너와, 네 남자친구가, 키스를 했다고 꼭 남자친구는 아니겠지만, 문을 잠그는 것을 깜박했다면, 나는 거기서 너희가, 네놈들이, 자리를 옮겨가서 키스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고, 그런 장소에서는 가슴에 손이 올라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너는, 내가 그 봉긋한 가슴에 손을 올리는 것을 그렇게 싫어했는데, 그 자식의 손이, 네 가슴을 한참이나 움켜쥐고 있는데도, 너는 그저 키스에만 열중하고 있는 그 꼬라지를, 나는 보았을 것이다, 필연적으로 보았을 것이다, 오늘은 수학 문제가 풀리지 않았으니까, 옥상에서 너를 마주쳤으니까,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아서 동아리방에 가지 않았지만, 내일이나, 아니면 내일 모레쯤에는, 여튼간 머지않아, 보게 될 것이다, 그 예쁜 가슴을 탐하는 손을. 왜 내게는 허락하지 않았을까, 그러한 불확실성조차도 머지않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너는 어느날, 술김에, 네 친구에게 나 Y군하고는, 하지 않았어, 사귀는 내내 확신이 없었던 것 같아, 그런 말을 하게 될 것이고, 아까 말했다시피 P공대에서 한 학년은 삼백명이니까, 네 친구는 내 친구이고, 내 친구는, 술김에, Y군, 넌 뭐, K양하고 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찌질대고 있냐, 라면서 털어놓게 될 것이고, 나는, 하필이면, 그 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것이 진공 상태에 있는 P공대의 필연이다. 모든 것이 에프는 엠 에이 대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참, 과학과 공학을 공부하는 P공대 답다고,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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